서울필름스쿨

“누구와 인터뷰하는지는 알아야죠.” 매체가 아닌 이름을 말하는 걸 테다. 음, 당연한 말인데 그동안 간과했다. 그는 잠시 명함을 살피다가 옆에 놓는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부터 잘 풀린 건 아니다. 몇 마디 나눠보면 안다. 지금 이 인터뷰가 어디쯤 헤매고 있는지. 처음 몇 분간 박신양은 신출귀몰했다. 말하자면, 서로 술래잡기 같은 거다.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사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진다. 링에 올라가기 전 상대를 링 건너편에서 흘깃거리는 것처럼. 박신양도, 에디터도 낯을 가렸다. 내색하진 못했지만 초조했다. 하지만 물꼬는 장학회에서 찾았다. 박신양은 2008년 장학회를 설립했다. 오랜 생각이 구체화된 행동이었다. 후배의 어깨를 다독이려는 선배의 마음이었다. 이제 5기를 뽑는다. 장학회 얘기로 시작된 인터뷰는 장학회로 끝났다. 하지만 단지 장학회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사이 오간 대화는 박신양 그 자체였다. 16년 활동한 배우 박신양이었다. 20여 년 연기만 해온 박신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변하지 않을 박신양이다. 가치와 신념, 영속성과 그에 따른 할 일…. 아쉬웠다. 좁고 어수선한 메이크업실과 어울리는 대화는 아니었으니까. 고즈넉한 산사에서 차 한잔하며 나눌 법한 얘기였다. 차 대신 과자는 먹었다. 그가 권한 바나나킥은 달기는커녕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가 한 말을 듣고 있자니 그랬다. 맛을 느끼기에는 생각할 거리가 많았으니까.

얼마 전에 장학회 관련 콘서트를 열었다고 들었다. 특이했다. 배우가 연기 장학회를 운영하는 것도, 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콘서트를 여는 것도.
없어서, 없으니까 내가 하는 거다.

보통 두 가지다. 너무 못 받아서 베풀게 되거나 받은 만큼 베풀거나. 어느 쪽인가?
내가 좋은 교육을 잘 받았다. 물론 애써서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좋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위할 수 있는지 알 거 같았다. 이건 교육받은 사람들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만 위하고 자기만 아는 것보다는, 자기가 가진 능력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넓게 쓸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더 좋다. 그러기 위해 나도 노력 중이다. 그래서 장학회를 만든 거다. 될 수 있으면 내가 아는 많은 것, 먼저 해본 걸 다음 세대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오래 걸리는 일이기 때문에 빨리 시작한 거고, 필요한데 없으니까 내가 먼저 시작한 거다.

어떤 기준으로 장학생을 뽑나? 박신양 같은 사람?
정직하고 솔직한 밑바탕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지금부터 많은 것을 솔직하게 습득해 나갈 수 있다. 비뚤어지는 거 순식간이다. 유명하지도 않은, 이제 연기를 시작하는 친구들이니까. 앞으로 10년 20년 동안, 잘못되면 한없이 비뚤어질 확률이 굉장히 높기에 솔직한 친구를 뽑는다. 연기 면에서 솔직한 척할 수는 없다, 절대로. 내가 보는 눈이 날카롭기에 연기할 때 솔직한 친구라면 1초면 잡아낸다. 음, 1초는 너무 과하고, 한 3초, 하하.

직접 수업도 진행하나?
그냥 그 친구들과 시도 때도 없이 연기를 주제로 얘기한다. 물론 그 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같이 영화도 보고, 연극도 보고, 등산도 하고, 훈련도 하고.

어떻게 보면 장학회라기보다 멘토링 같다. 학생에게 박신양이 멘토라면, 배우 박신양에겐 누가 멘토였을까?
선생님들. 내가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그들 모두다.

멘토를 떠나 아무래도 러시아 유학 시절이 영향을 많이 미쳤겠다.
거의 모든 부분. 정서까지도. 어제 날씨가 추우니까 러시아 생각이 나더라. 그때 거기선 그랬지, 그땐 그런 기분이었지, 하면서. 평소에는 바빠서 잘 생각나지 않는다.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예술의 도시일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사람들이 많이 생각하고.

러시아 유학 생활 동안 주위 동료와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고 들었다. 잘해서 그런가?
열심히 해서 그랬을 수 있다. 사활을 걸고 열심히 했으니까.

다른 환경, 도전 같은 걸 즐기나?
좋아한다. 이번 영화 <박수건달>도 그렇고. 매번 새로운 게 좋다.

<바람의 화원>의 장태유 PD가 평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박신양은 늘 폭발하는 활화산 같다. 자기 자신을 깨뜨리기 위해 여기저기 부딪친다’고.
그렇게 해야 한다. 사화산같이 하면 안 되는 거잖나. 새롭게 하기 위해서, 생명력을 담기 위해서 노력한다 . 좋은 선생님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워서 그렇다. 특히 러시아에서 많이 배웠다.

장학회도 그 연장선이겠다.
그게 제일 즐겁게 할 수 있는, 두루두루 아우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난 촬영하지 않으면 장학회 일을 한다. 가끔 여행하든가. 장학회가 또 다른 인생이다.

듣다 보면 장학회를 통해 스스로 영향받고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할 듯하다.
심심해서 장학회를 만든 게 아니라 절실해서 만들었다. 나 스스로 허무해지지 않으려고 만들었다. 기왕이면 깊고 오랫동안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길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일 많이 한다고 행복한가? 그건 아니다. 행복은 정확하게 교감에서 온다. 많은 사람들을 깊고 넓게 사귈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다 절실하게 찾아낸 거다. 그래야만 그걸 통해서 나눠줄 수 있는 거다. 얘기가 통해야, 얘기가 통하기 전에 차곡차곡 쌓아야 뭘 나눠도 나눠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는 훨씬 행복해졌다. 사람들을 스쳐가면서 만난다는 건 기분 안 좋어렵다. 바꾸자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닐 텐데.

절실하면 바꾸게 된다. 그만큼 절실한 선택이다. 16년 일했다. 계속 생각했다면, 10년 넘게 생각했으니 바뀌어야 할 시간이다. 생각은 충분히 성숙돼 있었다. 결국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바꾸는 건 나한테 의미가 없고, 나 자신을 바꾸는 거다. 사람을 만나는 방식을 바꾸는 거다. 스쳐 지나가는 것과 깊게 사귀는 것을 구분하고 살자는 거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고. 난 사람을 좋아한다. 순진하고 솔직해서 모든 사람이 깊게 만날 거라고, 오히려 한국 사람답지 않게 착각한 거 같다.

“한국은 예술에 대한 마인드 자체가 별로 없다. 보고 감상하고, 진짜로 가치와 정서를 얘기하는 면이 없다. 미안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의 생각도 정말 싸구려다. 이런 게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 결국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진 거다.”

그동안 많이 상처받은 것처럼 들린다.
그런 관계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누구나 사람을 만날 때 좀 더 진실한 관계로 발전하길 바라지 않나. 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지만, 난 그걸 느끼는 강도가 더 크다. 연기자니까 살아가면서 느끼는 게 더 크다. 그러다 분명해진 거다. 이거 심각하다고. 내 주변과 사람 관계가 이상하게 됐다. 이러다 시간이 지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느꼈다. 행복하지도 않은 거다.

최근 몇 년 영화에서 왜 보기 힘들었나? 그 심경에서 비롯된 건가?
몇 년 동안 처절한 영화들이 너무 많았다. 시나리오들이 엄청나게 잔인하고 이상했다. 자기들도 보기 싫은 영화를 관객에게 보라고 한다. 왜 그런 폭력을 저질러? 나는 안 한다. 하기 싫다. 영화면 다 해야 하나? 적어도 자기가 만든 상품을 사랑해야 그걸 남에게 팔든지 나눠주든지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보면 그건 폭력이다.

배우로서 인간의 추악한 면을 표현하고픈 욕심도 있지 않나?
별로 욕심 없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영화를 선택했다.
앞서 말한 것과는 관계없는 영화니까. 의외로 괜찮은 면이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코미디, 좋다. 얼마나 좋나. 극이 지닌 최고의 앙상블이랄까. 힘준다고 되는 게 아니라 상당히 고급스러운 테크닉이다. 코미디는 쉽지 않다. 특히 우악스럽지 않게 웃기기란 쉽지 않다.

공개된 사진을 보면 여장 분장 같은 과감한(?) 표현이 눈에 띈다. 어울릴까 싶다.
내가 봤을 때도 이상하지, 하하. 내가 좀 자신 있나 보다. 만약 조마조마하면 이렇게 얘기하지 못할 텐데. 이렇게 얘기하는 거 보면 조금 다른 영화 같다. 오래 신경 썼다. 이제까지 본 것에 비해 조금 다른 코미디를 만든 거 같다. 특이한 소재를 다뤘고, 정말 프리-프로덕션을 많이 했다. 한 줄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말 되는 코미디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데뷔한 지 16년 지났다. 연기 잘한다는 소리도 꽤 들었다. 이제 말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연기하면서 포기하지 않은 거라면?
최선을 다하는 것.

너무 착한 대답이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많이 준비하고 실제로 최선을 다하는 거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건 직무유기, 책임 소홀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든다. 노력하지 않으면 바로 부끄러워지는 거다. 연기를 준비할 때 실제로 용감한 짓을 많이 해야 한다. 누군가를 찾아다니고, 견학하러 가기도 하고. 절대 쉬운 일 아니다. 별로 반겨주는 사람들도 없고. 모르는 채로 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거다. 정말로 알지 못하면서 그냥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깊숙한 질문을 많이 했다. 생각이 뭔지 알아야 하니까. 남의 생각을 알지도 못하고 내 의견을 조율한다? 먼저 상대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 여러 가지 과정을 솔직담백하고 철저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완벽하려 한다느니 하는 말도 나온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건데, 하하.

하다 보면 나태해지지 않나. 경력도 쌓이고, 따라서 대우도 받으니까.
그 부분이 무서운 거다. 프로의 기질이 아니다. 그럴 생각은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죽을 때까지 철칙은 지켜야 한다. 철칙이란 건 고집이 아니라 기본과 기준이다. 그런 마음으로 장학회도 이어나가는 거다. 만약 한국 배우 중에 자기 이름을 딴 장학회 1백 개를 운영한다면 어떨까? 멋질 거 같다. 한국에 대학이 1백 개 정도 된다. 1백 개를 만들고, 그다음에는 고등학생들을 위해서 1천 개를 만들 생각이다. 그게 2차 목표다

그 목표까지 이루면 단지 예술적 재능을 키워주는 수준이 아니겠다. 교육이라는 큰 개념에 활기를 불러일으키는 거다.
내가 특별한 건 아니다. 한국에서 교육받았고, 유학 가서 러시아의 예술 교육을 본 거다. 한국 사람들은 러시아를 욕하지만, 그쪽 예술이 1백 년 앞서 있다. 아니 한국은 예술에 대한 마인드 자체가 별로 없다. 보고 감상하고, 진짜로 가치와 정서를 얘기하는 면이 없다. 미안하지만, 만드는 사람들의 생각도 정말 싸구려다. 이런 게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 학생에게 질문해보면 간단해진다. 한 가지 물어보며, 이거 생각해봤니? 하면, 처음 들어본다고 한다. 뭐라고? 대학교 3학년이나 됐는데 그런 질문을 못 받아봤어? 이런 상황이다. 어제도 밤에 늦게까지 통화하면서 얘기했는데, 자신에게 그런 걸 질문한 사람이 처음이라고 하더라. 결국 노력하지 않기 때문에 없어진 거다. 그렇게 돼버린 특별한 당위성이 있었던 건 아니다. 가치에 대해, 의미에 대해 철학자만 생각하나? 예술가도 해야 한다.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자꾸 결과만 좋게 평가받으려 하는 건 맞지 않다. 내가 너무 열변을 토하는 건가? 하하.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가치를 생각하고 지키고 발전시키려고 노력한다.

이제 마흔 중반이다. 배우 박신양으로서든, 인간 박신양으로서든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그냥 물리적인 거다. 물리적인 시간이 간다는 것. 의미 없다.

왠지 괜찮은 답이 나올 거 같다. 멋진 남자가 어떤 남자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딱 멋진 남자 말고 내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에 관한 얘기가 답이 되겠다. 나는 어차피 없어지는 존재다. 그래서 장학회를 만들려고 노력한 거다. 그렇다고 이런 걸 내가 한다는 자존심, 자기 인식은 별로 없다. 나라는 게 특별하진 않으니까. 옛날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단지 어차피 없어지는 거니까. 몸은 산화돼 없어지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나무 한 그루 심는 거다. 다음 사람들을 위해 희망을 만들어준다는 건 의미 있다. 그렇게 살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 장학회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오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고, 실제로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고, 세상에서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에 많이 설명한다.

이해한다. 이제 장학회는 삶의 큰 축인 듯하니까.
세상에 장학회는 널렸고, 돈이 많은 사람도 많다.하지만 연기자들이 장학금으로 도움을 받고 멘토링을 받아야 한다고 인식하는 사람은, 의심스러울 정도로 별로 없다. 과학 하는 친구들을, 체육 하는 친구들을 어려서부터 교육시키지 않고 지원하지 않으면 미래는 없는 거다. 마찬가지로 예술 하는 사람을 교육시키지 않으면 우리의 볼거리가 없어지는 거다. 보고 생각할 가치를 더 깊게 만들어줄 사람이 없어지는 거다. 이 간단한 사실이 왜 간과되는지 잘 모르겠다.나는 다행히도 좋은 교육,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났다. 내가 겪었던 게 이렇게 없어져도 되나? 자신 있나? 아닐 텐데? 이렇게 생각이 뻗어나갔다. 나는 뭐 어차피 없어질 거니까. 우리 모두 유한하다. 아주 짧은 시간이니 뭔가 하는 건 중요하다.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영속성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을 소개하거나 내 경험에 비춰 한마디 해주는 거다. 대단한 거 필요 없다. 딱 한마디 때문에 사람의 길이 바뀌기도 한다. 절실해질 때,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스스로 가장 절실한 단어를 만날 때 길이 바뀐다. 그 가능성을 많이 열어주는 거다. 그게 내가 하고 있고, 앞으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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